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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개봉작 중 현시점 기준 완성도와 순수 재미 양쪽에서 가장 앞서 있다고 판단한 영화, 《마티 슈프림》을 봤습니다. 포스터만 보고 그냥 흔한 스포츠 성공 신화겠거니 했는데, 극장에 들어가자마자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이 영화는 제가 기대했던 것과 달리 성공담이 아니라 실패와 성공이 기묘하게 뒤엉킨 이야기였습니다.
1950년대 탁구와 한 청년의 야망 — 배경과 맥락
《마티 슈프림》은 실존 인물 마티 리즈먼을 모티브로 한 영화입니다. 마티 리즈먼은 실제로 미국 탁구 국가대표로 활약했던 인물로, 방송 출연과 내기 탁구로 생활비를 충당하며 독특한 행보를 걷었습니다(출처: 국제탁구연맹(ITTF)). 영화는 그 실화를 바탕으로 1950년대 초반 미국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데, 이 시대적 배경이 핵심입니다.
당시 탁구는 올림픽 정식 종목이 아니었습니다. 탁구가 올림픽에 처음 채택된 것은 1988년 서울 올림픽입니다. 쉽게 말해 지금은 세계적 스포츠로 완전히 자리 잡은 탁구가, 영화 속 시대에는 아이들이나 치는 유치한 공놀이 취급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제가 이 부분을 보면서 처음엔 단순한 시대 배경 설정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나중에 돌이켜 보니 이게 영화 전체 주제와 맞닿아 있더군요.
주인공 마티 마우저는 삼촌이 운영하는 신발 가게에서 알바를 하면서도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 우승이라는 꿈을 품고 있습니다. 그것도 단순히 우승에 그치지 않고, 오렌지색 탁구공을 핵심으로 한 자신의 스포츠 브랜드 '마티 슈프림'을 론칭하겠다는 비전까지 세워 놓고 있죠. 투자자 앞에서 마티가 설명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는데, 당시 탁구가 흰색이 아닌 검은 운동복을 고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흰색 탁구공과의 시인성 문제 때문이었다는 분석은 꽤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시인성이란 공이 배경에서 얼마나 잘 보이는지를 나타내는 개념으로, 흰 공과 흰 옷이 겹치면 경기 진행에 방해가 된다는 논리입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설정이라면 관객은 '저 청년이 결국 해낼 거야'라고 응원하며 따라가게 됩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봤을 때 이 영화는 그 공식을 노골적으로 비틉니다.
사기꾼인가 선구자인가 — 마티 마우저 캐릭터 분석
마티를 바라보는 제 마음은 영화 내내 핑퐁처럼 왔다 갔다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스포츠 영화의 주인공은 결점이 있어도 근본적으로 선한 인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제 경험상 마티는 그 공식에서 꽤 멀리 벗어나 있는 캐릭터였습니다.
마티가 동네를 돌며 벌이는 내기 탁구는 이른바 허슬링(hustling) 수법입니다. 허슬링이란 실력을 감추고 초보자인 척 상대를 속여 판돈을 점차 키운 뒤, 마지막에 진짜 실력을 드러내 상금을 독식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마티는 뉴욕 동네 곳곳을 돌며 이 수법을 반복했고, 그 과정에서 동네 깡패들에게 들켜 목숨을 위협받기도 합니다. 우연히 만난 할아버지의 강아지 치료비를 가로채 판돈으로 쓰는 장면에서는 솔직히 응원하는 마음이 완전히 꺼지더군요.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마티의 어머니가 중요한 대회 직전마다 응급실에 실려 간 척 연기를 하며 아들을 붙잡는 가스라이팅 장면이 나옵니다. 가스라이팅이란 상대방의 감정과 판단을 교묘하게 조종해 죄책감을 심는 심리적 조작을 의미합니다. 삼촌은 월급 지급을 일부러 미루며 대회 출전 비용을 마련하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마티의 모든 망나니짓이 결국 이 환경을 뚫고 꿈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자금 마련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판단이 흔들립니다.
티모시 샬라메는 이 이중성을 절묘하게 연기합니다. 《캐치 미 이프 유 캔》의 프랭크 애버그네일처럼, 분명히 나쁜 사람인 걸 알면서도 이상하게 마음이 넘어가는 그런 매력입니다. 영화의 오프닝 배경음악으로 쓰인 'Forever Young'은 발표 당시 냉전 시대의 핵전쟁 공포를 배경으로, 늙은 지도자들에 의해 젊음이 소멸될 수 있다는 불안을 담은 곡입니다. 겉으로는 젊음을 찬양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그 이면의 비극을 은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마티라는 인물 자체와 완벽하게 겹칩니다.
- 허슬링 수법으로 판돈을 모아 대회 출전 비용을 마련
- 어머니의 가스라이팅과 삼촌의 경제적 방해를 동시에 견딤
- 탁구채 대신 냄비로 서커스 묘기를 선보이며 생활비를 충당
-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면서도 도망치는 책임 회피
실패한 꿈과 얻은 것 — 이 영화가 실제로 말하는 것
저는 그림 스톡 작가로 활동하면서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매달 조금씩 오르던 매출이 어느 순간 제자리걸음을 멈추지 않았을 때,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게 맞는지 의심이 들었습니다. 결국 꾸역꾸역 이어갔고, 다시 매출이 오르기 시작했을 때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결과가 보이지 않을 때도 계속하는 것, 그게 꾸준함의 진짜 의미라는 것을요. 마티의 결말을 보면서 그 경험이 떠올랐습니다.
마티는 로결 회장의 요구에 따라 일본에서 열리는 세계 선수권 대회 출전권을 얻으려 하지만, 결국 자신이 출전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모든 계획이 무너집니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 어차피 잃을 것이 없어진 마티는 로결 회장의 지시대로 엔도와의 경기를 조작하는 대신 진짜 경기를 선택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겨봤자 아무 이득도 없는 이 친선 경기에서 그토록 꿈꿔왔던 흰 옷을 입고 우아하게 탁구를 치는 '마티 슈프림'의 비전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실현됩니다.
엔딩에서 흐르는 'Everybody Wants to Rule the World'는 이 영화의 주제를 정면으로 요약합니다. 이 곡은 1985년 Tears for Fears가 발표한 곡으로(출처: Rolling Stone), 세상을 지배하고 싶다는 인간의 욕망과 그 허망함을 동시에 담고 있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 중 자신이 원하는 것을 완벽하게 얻어낸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마티도, 로결 회장도, 여배우 K도, 라이벌 엔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반적으로 성공 서사는 목표를 이루거나 이루지 못하거나 둘 중 하나로 결론이 납니다. 그런데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느낀 건, 마티의 성적표가 그 어느 쪽으로도 깔끔하게 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세계 선수권은 나가지 못했지만 사실상의 세계 최강자를 이겼고, 브랜드는 런칭하지 못했지만 사람들을 열광하게 만들었으며, 아이는 부정했지만 결국 눈물을 흘리며 받아들였습니다. 그 묘한 성적표가 오히려 우리 삶과 훨씬 더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마티 슈프림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인가요?
A. 네, 실존 탁구 선수 마티 리즈먼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하고 있습니다. 다만 영화적 각색이 상당히 들어가 있어서 다큐멘터리가 아닌 픽션으로 봐야 합니다. 실제 마티 리즈먼도 내기 탁구와 방송 출연으로 생계를 해결했다는 일화는 사실로 알려져 있습니다.
Q. 마티 슈프림 아카데미 노미네이트 받았나요?
A. 이 영화는 작년 12월 해외 개봉 이후 아카데미 시상식과 골든 글로브 등 여러 시상식에서 다수 부문에 노미네이트됐습니다. 수상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그만큼 작품성은 이미 검증을 마친 상태에서 국내 개봉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Q. 탁구를 모르는 사람도 재미있게 볼 수 있나요?
A. 탁구 전문 지식은 전혀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탁구 경기 자체보다 한 인물의 욕망과 성장, 그리고 관계에 더 집중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탁구는 배경 장치에 가깝고, 영화의 본질은 인간 군상을 다루는 드라마입니다.
Q. 15세 관람가인데 수위가 어느 정도인가요?
A. 직접적인 노출은 없지만 성관계를 암시하는 장면이 오프닝에 컴퓨터 그래픽으로 꽤 적나라하게 표현됩니다. 내용적으로는 15세 관람가 기준에서 상당히 아슬아슬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린 자녀와 함께 관람하려는 분이라면 미리 참고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결론
《마티 슈프림》은 성공 공식을 비틀면서 오히려 더 진짜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낸 영화입니다. 주인공이 모든 것을 얻는 결말도 아니고, 비극적으로 모든 것을 잃는 결말도 아닙니다. 뭐 하나 완벽하게 이루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실패하지도 않은, 그 애매한 지점이 오히려 제가 극장을 나오면서 오래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스포츠 영화를 기대하고 들어가면 예상 밖의 인간 드라마를 만납니다. 성공 신화를 기대하고 들어가면 실패의 아이러니를 만납니다. 그 반전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반기 대작들이 개봉하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현시점에서 올해 개봉작 중 가장 인상 깊은 영화였다는 판단은 변함이 없습니다.
